천일각·월호 관광지는 천일각 박물관과 월호를 포함한 두 곳의 명소로 구성되었다.관광지의 핵심구역 면적은 약 1제곱 킬로미터로 각급 문물보호단위와 문물보호대상이 50여 군데나 되며 3개의 국가급 중점 문물보호단위가 있다.
예로부터 “물가에 있는 고루에 먼저 달이 뜨고 성곽의 경치는 호수가 반을 떠맡는다”고 했다. 월호의 수역면적은 9헥타에 달한다. 옛적에 월호는 서호, 감호로 불리웠는데 역대로 문인과 선비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절강 동부 학문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쳐 왔다. 월호는 당나라 정관 연간(627-649)에 건설되기 시작하여 당나라 태화 7년(833)에 그 모습을 완전히 갖추었다. 북송시기 경력7년(1047), 왕안석이 은현의 지현으로 부임한 뒤 월호가에서 유명한 유학자들인 “경력 5인”을 초빙하여 사명학풍을 크게 흥기시킨 적 있다. 이는 또 절동학술의 맹아로 되기도 했다. 원우 연간(1086-1094), 선후로 지주직에 있었던 유숙과 유정은 월호에 대해 대규모적인 수선을 진행하여 나중에 “십주”의 절경을 이루었다. 정화 7년(1117), 지주였던 누이는 월호가에 고려사행관을 지었고 월호로 하여금 “해상 실크 로드”에서 찬연한 빛을 뿌리는 진주로 부상하도록 했다. 남송이 임안(항주)에 정도 (定都)한 뒤 수도권과 가까운 지연적 원인으로 하여 왕실과 대신들은 잇따라 명주에 와 정치사무를 보기 시작했다. “한 가문에서 3명의 재상을 배출했고 4세대에서 2차례 왕으로 책봉”되었던 사씨 가문의 경영하에 월호 지역은 시사, 서원과 장서루가 즐비한 곳으로 되었다. “순희 4인”들은 월호가에서 학문을 전파하여 “사명학파”를 형성했는데 이로 하여 절동학파는 전성시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명나라 가정 40∼45년간(1561-1566), 병부 우시랑이었던 범흠은 월호 서안에 천일각을 지었다. 중국에서 현존하는 장서루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이 개인 장서루는 이미 450 여 년간 월호가에 우뚝 솟아 책의 향기와 문맥을 연면하게 이어가고 있다. 명청 교체시기, 절동학술은 더욱더 눈부신 성과를 이룩했는바 월호가에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심원한 영향을 끼쳤던 학파의 한갈래인 절동학파가 형성되었다. 절동학파의 창시자이며 명말 청초 3대 사상가 중의 한사람이었던 황종희는 월호가에서 학문을 전파하며 많은 제자를 받아들였고 월호가에서 생활했던 만사대, 만사동, 전조망은 모두 절동학파의 중요한 대표인물로 되었다. 기개를 중히 여겼던 절동학파의 학풍으로 하여 월호는 또 그 시기 청나라의 통치에 반항하고 명나라를 잊지 않았던 유민들이 비분강개한 정서를 분출하는 중심지로 되기도 했다. 이 밖에 절동학파들이 주장한 “공상개본(工商皆本)”이라는 사상은 중국에서 으뜸가는 상공업 단체였던 닝보 동아리를 탄생시키기도 했으며 “경세치용”의 이념은 닝보로 하여금 후세에 “원사의 고향”으로 되게 했다.
유유한 옛 성은 자기의 오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그 자리에 서있다. 오늘날, 여기에 일떠선 천일각·월호5A급 관광지는 “책 향기 넘치는 닝보”와 “시와 회화의 고향인 절강”의 내포를 한층 승화시켜 우리들에게 집착할수 있고 지켜볼수 있는 또 하나의 정신적 터전을 마련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