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시기의 건축물로 구급(區級) 문물보호단위이다. 문루, 앞대청, 중간대청, 뒷청사에 동서 양켠의 상방(廂房)으로 구성되었다. 여기는 원래 송나라때의 사씨가문의 세록건물이었는데 원나라말 명나라초때부터 방국진(方国珍)의 형제인 방국영(方国瑛)의 응접건물로 씌였다. 명나라 가경년간(1522-1566) 귀주의 포정사인 장연(張渊)이 여기에 자택을 지었는데 건물앞에 대방악제(大方岳第)라는 글자가 새겨진 패방이 세워져 있었기에 이 이름으로 불려졌으며 장방악제(
북송시기의 정화(政和)7년(1117년) 명주 지주 누이(樓:樓:樓樓異)는 휘종황제의 어명에 따라 명주에 고려사를 세웠고 월호의 국화주에 국가급 영빈호텔인 고려사행관을 지었다가 후에는 폐관되었다. 남송시기 재상중에서는 처음으로 닝보태생이었던 사호(史浩)가 국화주의고려사관 옛터위에 수악부를 지었고 그뒤쪽에 보규정사(진규각)을 지엇다. 그뒤 여기에는 또 토지묘를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까지 전해내려오는 보규묘이다. 1999년 보규묘와 보규건축군의 부분적인
국가급 중점문물보호단위이다. 수칙비는 세계문화유산인 “중국 대운하-닝보구간”에서 중요한 수리시설 문물로서 절강성에서 가장 일찍 사용된 수문관측소이다. 이 돌비석은 명주의 지부였던 오잠(吳潜)이 송나라 보우연간(1253-1258)에 건설한것으로서 물의 수평원리를 이용하였다. 성밖의 댐에서는 “平”자의 두 건너금이 물에 잠기는 여부에 따라 수문을 열거나 닫기로 되어있다. 이 시설의 사용으로 하여 백성들은 홍수피해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수칙비는 명나라와 청
민국 시기 건물로 시급(市級)문물보호단위이다. 이 건물은 대문, 전당(前堂), 정방(正房)으로 구성한 서식(西式)삼합원(三合院) 구조이다.장개석(蔣介石)의 이복형인 장개경(蔣介卿)이 절강 세관의 감독으로 있을때 지은 것이다.장개경, 아명은 서생(瑞生), 호는 석후(锡候), 족보명은 주강(周康),자는 개경(介卿)이다.만청 시기 닝보관청의 대단한 수재로 닝보의 사명전문대학 법정과를 졸업했다.민국 초기,장개석이 상해에 주둔하고 있을때 장개경은 군법관직을
명나라 만력34년(1606년), 육세과(陸世科), 리강선(李康先) 등 17명의 닝보적 학생들이 동시에 거인에 합격하여 당지에서 큰 화제거리로 되었다. 절강순무 감사계(甘土階)는 이 17명 거인들이 향후 당나라시기의 도여회, 현방령 등 “18학사”들처럼 조정의 중용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3개 방에 4개 기둥구조의 영주접무방을 지었다. 이 건물에는 선학, 기린, 사자머리, 소머리 등이 생동하게 부각되어 있는데 그 공예가 섬세하고 예술성도 아주 높다.
청대(清代)건물로 구급(區級)문물보호단위이다. 북쪽에 자리잡고 남쪽을 바라보는 이 건물은 내부는 미륵전,대웅보전, 삼성전, 지장전, 원통전, 염불당, 등 6개의 불전과 장경루 등 동쪽과 서쪽의 사랑채인 상방(廂房)으로 구성되었다. 남송 시기는 함허관(涵虚館), 원대(元代)초기는 가사(家祠), 후에 역관(驿館)으로 고쳤다. 청(清)건륭연간 현단전(玄坛殿)을 시건(始建)하였으며 현존 건물은 도광(道光)15년(1835년)에 중건(重建)한것이다. 193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