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서는 월호동안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비취색 구름 파도 속에 비끼니 청아한 그림자 조각달 불러오네”. 송나라시기 죽서에는 “경력의 5인”중의 한 사람인 누욱이 거주했다. 누욱은 광덕호를 메워 옥답으로 만든 인물이다. 또 “경직도”시리즈를 그렸던 누숙, 대학사였던 누약까지 합쳐 “서호의 누씨”로 불렸다. 죽서는 송나라 때에는 누씨의 의전 농장, 공괴제, 백취각, 앙송루, 등봉루, 매록, 왕씨 가문의 우공당, 응씨 가문의 사학, 장춘서원, 계방교의 고씨
연서는 월호서안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잔잔한 파도에 옷소매 하느작거리는데 도롱이와 뗏목 그 속에 가리워졌네.” 여기는 원래 월호 어민들의 집거지였다. 북송후기 용도각의 대제였던 서단은 고향에 돌아온 뒤 여기에 라당을 짓고 지기들과 수창하여 닝보에서 시사를 결속하는 첫발을 떼었다. 남송시기 여기는 변진사의 개인학당, 누삼학사의 저택, 조학사의 저택으로 사용되었다. 명나라시기 연서에는 육씨 저택, 상서 저택, 중승 저택, 방안 저택, 급간 저택 등이 있
설정은 월호서안의 부용주와 연서 사이에 위치해 있다. “칼바람 속에 버려진 옥돌 정교하게 벼려지는데 양왕궁 안에는 낡은 누대만 남아있네”. 여기는 송나라시기 관음선종 사찰, 사휴당, 매화장벽 등 유적을 남겼고 명나라시기에는 광영창, 주관찰 저택, 가로각으로 사용되었고 청나라시기에는 월호서원으로 사용되었다. 관음선종 사찰은 원래 오월왕 전숙의 동생이며 절도사였던 전억의 저택이었다가 송나라 건륭연간(960-963)에 관음선종 사찰로 되었다. 건염4년(11
죽주는 월호중부 네개 주(洲)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 “몇 군데에 푸르른 대나무 심었더니 얼마 안되어 벌써 고인의 풍채 품었네”죽주는 원래 송도라 불렀다. 남송의 승상이었던 사호가 진은관을 지은뒤부터 죽주로 개칭했다. 송나라시기에는 누욱이 학문을 전파하는 학당, 금조당, 왕씨의 주금당, 사씨의 진은관, 사명동천, 사소사의 저택, 죽주 삼선생 서원 등 유적을 남겼고 명나라 때에는 육강희의 사당, 전씨의 별장 등으로 사용되었다. 북송 경력연간, 왕안석은
시급(市級)문물보호단위로서 현제 관사박물관이기도 하다.청나라 도광3년(1823년)에 지어졌는데 건물은 북쪽에 자리잡고 남쪽을 바라보는 구조로 지금은 앞뒤 3채 건물의 규모만 남았는데 주로 현관, 중앙 대청, 중앙 청사, 후당, 동쪽과 서쪽의 사랑채인 상방(廂房)으로 2천여제곱미터 부지면적 규모로 닝보지역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청나라시기 민가중의 하나이다. 은대제의 주인 동괴(童槐)는 청나라 가경연간에 “통정사 부사”, “통정사” 또는 “은대”라고도
구급(區級) 문물보호단위로서 닝보시에서 현존하는 명나라시기의 주택건축중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이 가장 완전하다. 부지면적은 약 2442제곱미터로 범중암(範仲淹)의 제17대 후손인 명나라시기의 범억((範億))이 지었다. 이 건물은 남북방향의 중축선을 따라 지어졌는데 앞뒤 3개의 대청과 좌우 상방(廂房)으로 구성되었고 규모가 비교적 큰 “日”자형의 목조건축군이다. 외곽의 골마루와 중간대청, 뒷건물의 마루는 “月”자형을 이루었다. “日”자와 ”月”자를 합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