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대(清代)건물로 구급(區級)문물보호단위이다. 명나라 숭정(崇祯) 3년(1630년)에 시건(始建)하였고 청나라 강희(康熙)연간(1662-1722)에 중건(重建)하였다. 주로 사당문,희대(戲台),대전,후전,동쪽과 서쪽의 사랑채인 상방(廂房)으로 구성되었다.절 안에는 무성(武聖)관공(關公)을 모셨다. 3국시기 촉나라(蜀国) 대장군 관우(關羽)는 후세들로부터 “文聖人”이라고 존대받는 공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으며 무성관공이라고 존대받았다.
청대(清代)건물로 구급(區級)문물보호단위이다. 이 건물은 당대(唐代) 시인 하지장(賀知章)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송(宋) 소흥 14년(1144년), 군수(郡守)인 막장(莫将)은 일로당(逸老堂)을 짓고 하지장과 이백을 기렸다.수차례의 흥망과 개보수 작업을 거친 뒤, 원(元) 지정 (至正)19년(1359년)에 , 사당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명(明) 홍무(洪武)연간 (1368-1398)에 현위치로 옮겨왔으며 현존 건물은
민국 시기 건물로 시급(市級) 문물보호단위이다. 건물은 북쪽에 자리잡고 남쪽을 바라보며 주로 대문(台門),현관, 중앙 청사, 도좌방(倒座), 상방(廂房),후루로 구성되었다. 이 저택은 원래 닝보의 저명한 교육가였던 양국정(楊菊庭)의 자택이다. 양국정(1888 -1969),이름은 이성(貽誠),자는 국정(菊庭),별호는 단허(端虚)이다. 50여년간 교사직에 있었으며 저명한 문학가인 파인(왕임숙), 유명한 서예가인 사맹해 등은 모두 일찍 양국정의 제자들이었
여기는 청나라시기의 건물로서 닝보 시급(市級) 문물보호대상이다. 이 건물은 남송시기부터 짓기 시작했는데 주랑, 장식용대문, 정전과 후전 등으로 구성되었다. 송나라 건염 연간(1127-1130)기간 두개장군이 송고종을 호위하여 명주에 와 금나라 군대와 격전을 벌였다고 한다. 그 뒤 두개장군은 병으로 사씨 가문의 화과원에 체류했다. 원내에는 안남(지금의 베트남)에서 온 두 마리의 기이한 짐승이 있었는데 두개장군 곁을 한발작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두개가
청나라시기의 건물로서 시급(市級) 문물보호단위로 후세에는 월호암으로 불리웠고 청나라 동치연간(1873년) 보수 (補修)를 진행한적 있다. 역사적으로 호심사는 “수륙명도원”이란 별호도 갖고 있다. 북송시기 치평(治平)원년부터 치평4년(1064-1067)간 건설되기 시작하여 희녕(熙寧)원년(1068년) 송신종으로부터 수성원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남송 소흥32년(1162년) 송고종으로부터 “호심광복사”란 편액을 하사받은 뒤 수차례의 흥망을 거듭했다. 명나라
청나라때의 건물로 시급(市級) 문물보호단위이다. 청나라 도광시기부터 건조되었다. 주건물은 남쪽을 향해 있고 중축선에는 차례로 도좌방, 정당, 사랑방과 부속 건물 등이 있다. 저택의 주인이었던 원앙주(袁仰周)는 도광연간 도원이란 관직에까지 올랐다. 청나라때의 문학가였던 요섭(姚燮)도 오랜 기간 여기서 거주한적 있는데 자기가 거주하던 곳을 침호초당(枕湖草堂)이라 이름지었고 닝보의 문사들과 “침호시사(枕湖詩社)”를 결속하여 오랫동안 명성을 떨친적 있다. 지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