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청나라 말기 학자였던 서시동(1814년-1873년)의 세번째 장서루로서 후에 여기로 옮겨온 것이다. 서씨는 자가 정우, 호는 유천으로 어려서부터 독서와 장서를 즐겼다. 그의 장서경력은 파란만장했지만 초심만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모아둔 책들은 거개 닝보 당지의 문헌으로 한때 크게 이름을 날렸다.
천일각의 서남쪽에 위치한 남원은 3400제곱미터의 부지면적 규모다. 원내의 주된 경관은 물로서 물과 햇빛이 어울려 어른거리고 못가에는 쌓아놓은 돌들이 영롱하다. 옹근 원림내는 시냇물과 바위가 산뜻하게 어울리고 누각들이 청아함을 자랑하고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윽하고 안일하며 청담한 감을 느끼게 한다. 원내에는 청나라때 닝보의 장서가였던 서시동의 수북각과 노지(盧址)의 포경청을 옮겨다 놓았다.
마작은 중국 게임문화를 집대성한 놀이라 할수 있다. 마작은 원래 마조패, 주사위와 송나라시기의 32장의 선화패가 화합되어 이루어진 것으로서 정합, 유전과 발전과정이 모두 닝보와 밀접히 연관된다. 지금 마작의 발명자인 진정열 선생의 가족 사당은 “마작의 역사와 문화”, “마작과 닝보”, “세계각지의 마작패 전시” 3개 전시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중국식, 서양식 두개의 게임실과 게임조각물을 곁들여 관객들에게 마작의 역사발전과 맥락, 연원을 보여주고 있는데
닝보의 꽃가마는 만공교라고도 불리는데 정예한 가공으로 이름났다. 전시된 꽃가마는 목조각물로서 옻칠을 하고 금박을 입혔으며 꽃묶음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었다.전하는데 의하면 남송시기 소강왕 조구가 금나라 병사들에게 쫓기워 여기로 왔을 때 닝보 어느 마을의 처녀가 구해주었다고 한다. 위험에서 벗어난 뒤 강왕은 이듬해에 처녀를 왕궁에 맞아들일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약속한 암호가 누설되었기에 조구는 칙명을 내려 절강성 동부의 처녀들은 모두 책봉을 받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