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부터 1925년까지 지어진 것으로 진씨 가문에서 조상들에게 제를 지내는데 사용되었다. 당시 돈으로 20여만위안의 은전을 들였다고 한다. 여기는 2.6무의 부지면적에 건축면적은 2천여제곱미터에 달한다. 여기는 목조각, 석조각과 벽돌조형, 금박 입히기 등 민간공예를 도입하였는데 닝보 민가건축 예술을 지대성한 작품이다. 진씨 사당의 극무대는 조각, 금박 장식, 옻칠 공예로 꾸며졌는데 찬연한 광채를 뿜고 있다. 천정은 천여개의 조각을 거친 장부가 장붓
청나라 함풍2년(1852년) 닝보의 장원인 장금의 대청으로서 규모에서는 닝보의 으뜸으로 꼽힌다. 지금의 이 장원청은 후에 여기로 옮겨온 것이다. 장금은 자가 채남으로 한림원의 수찬을 지냈고 관직은 국자감의 제주로까지 올랐다. 사천, 광서의 향시를 주관하고 충회시의 동고관직에도 있었다. 또 복건, 광동에서도 시찰활동을 벌여 그 이름을 날렸다.
부용주는 월호서안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붉은 구름 보여도 벌은 따라 날지 않고 아득한 찬파도 노을 속의 꽃 비추네”. 전해지는 이 시구처럼 십주는 형성될 때부터 연꽃과 인연을 맺었는데 십주의 붉은 연꽃은 부용으로 불리워 왔다. 부용주는 송나라시기 상평창, 평적창, 사씨 승상부로 불리기도 했다. 명나라시기에는 문천의 저택, 이상서의 저택, 이도독의 저택, 범시랑의 저택, 천일각, 양상서의 저택, 황부윤의 저택으로 쓰였다. 사씨 승상부는 남송의 승상이었
국화주는 월호 동안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금빛 꽃망울 비 무릅쓰고 피는데 청아함은 세속의 티끌 한점 묻지 않았네”. 옛적부터 국화주에는 국화가 많았다. 북송시기 여기는 고려사관으로 사용되었고 남송시기에는 승상이었던 사호의 월왕부, 풍제사의 저택, 풍상서의 저택, 사충선의 저택, 보규묘, 수칙정으로 사용되었다. 원나라시기에는 방씨의 응접실로 사용되다가 명나라시기에는 고려의 장씨, 장중승의 저택, 장방악의 저택, 전태사의 저택, 시항서씨 저택, 갈방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