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주는 월호서안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붉은 구름 보여도 벌은 따라 날지 않고 아득한 찬파도 노을 속의 꽃 비추네”. 전해지는 이 시구처럼 십주는 형성될 때부터 연꽃과 인연을 맺었는데 십주의 붉은 연꽃은 부용으로 불리워 왔다. 부용주는 송나라시기 상평창, 평적창, 사씨 승상부로 불리기도 했다. 명나라시기에는 문천의 저택, 이상서의 저택, 이도독의 저택, 범시랑의 저택, 천일각, 양상서의 저택, 황부윤의 저택으로 쓰였다. 사씨 승상부는 남송의 승상이었
국화주는 월호 동안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금빛 꽃망울 비 무릅쓰고 피는데 청아함은 세속의 티끌 한점 묻지 않았네”. 옛적부터 국화주에는 국화가 많았다. 북송시기 여기는 고려사관으로 사용되었고 남송시기에는 승상이었던 사호의 월왕부, 풍제사의 저택, 풍상서의 저택, 사충선의 저택, 보규묘, 수칙정으로 사용되었다. 원나라시기에는 방씨의 응접실로 사용되다가 명나라시기에는 고려의 장씨, 장중승의 저택, 장방악의 저택, 전태사의 저택, 시항서씨 저택, 갈방안의
방초주는 월호의 네개 주(洲)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다. “못에는 봄물 가득하고 꽃과 풀은 끝없이 우거졌네” . 방초주는 또 벽지라고도 불린다. 송나라 때에는 벽지정, 사수지의 별장, 양자호의 서원, 사문경의 서당으로 사용되었고 명나라시기에는 범사마 사당 등 유적을 남겼다. 남송시기 승상이었던 사호는 국화주에 자택을 짓고 방초주에 서당을 지어 “경력의 5인”중 으뜸으로 꼽힌 양간을 초청하여 학문을 전파했다. 그뒤 사호의 손자인 사수지는 벽지를 양간에
유정은 네개 주(洲)중의 하나로 월호에서 가장 일찍 형성된 명소이다. 북송의 천희5년(1021년), 승려였던 온진이 유정에 동동동교와 동동서교 두개의 다리를 지었는데 지금은 각각 육전교와 상서교로 불리고 있다. 그뒤 군수였던 전공보는 수로를 다스리고 언제를 쌓았으며 언제에 화목을 심고 중낙정을 지어 “중낙에는 정자가 새롭게 들어서고 주랑에는 수려한 경치가 널려있고 세워진 다리는 언덕에 좌우한”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었으며 이 지역으로 하여금 “노닐며 경치
월도는 월호동안의 국화주와 죽서사이에 위치해 있다. “밝은 달 바닷가의 뭍 비추는데 푸른 파도 가을 속에서 맴도네”. 월도에는 옛적에 뇌가교의 송씨, 주야방의 소씨, 영녕항의 비씨, 화과원묘, 신천연당, 건비교의 송씨 등 가문의 유적이 남아 있었다. 월도에 존재했던 칠목장군묘는 남송초년 강왕 조구가 금나라 군대에 쫓겨 명주(닝보)까지 왔을 때 그를 구하기 위해 희생된 7명의 목동을 기리기 위해 지은것이다. 조구와 관련된 또 하나의 건물은 화과원묘로서 이
화서는 월호의 중심부에서 가장 큰 섬으로서 십주 중의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그윽한 향기 속에 나비도 취하니 자홍색 꽃바다 속에 앉아 시를 읊어보네”. 여기는 옛적에 호심사, 십주각, 등휘각, 창주각, 원충신의 사당으로 사용되었고 명나라시기에는 장씨의 월호 저택, 보륜당으로 사용되었으며 청나라 때는 월호암, 원씨 저택으로 사용되었다. 화서는 동쪽으로는 월도, 서쪽으로는 연서와 이어졌고 중부에는 두개의 다리가 놓여져 있는데 각기 호심동교와 호심서교로 불